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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CE 2020 · 05 · 27

133. 은/는

Editor 분홍이글루

어느새 친구네 집에 놀러갔던 게 기억도 안 나는 어른이 되었다. 원체 남의 집 현관에만 들어서도 침범하는 기분이 들어 쭈뼛거리기 일쑤였던 필자는 ‘차라리 밖에서 놀고말지’라는 주의이다. 마음이 불편할 바에는 몸이 불편한게 나으니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등학생 때에는 학생회 때문에 학교 근처 친구네 집에서 신세를 지기도 했었다. 이제와 떠올려 보면 재밌는 일이다. 

사실 ‘집’은 거주의 공간이면서 계급을 상징하기도 해서 선뜻 남의 집에 가도 되는지 묻기 어렵다. 집으로 비춰 볼 나, 우리 집의 생활 수준이 남의 눈에 어떻게 비춰질까에 대한 고민, 누구나 한 번쯤 해보지 않았을까? 더 이상 친구의 집에 놀러가기 어려운 것은 각자가 바빠진 탓도 있겠지만, ‘나의 생활’이 노출되어 어떻게 변할지 모를 친구의 ‘나 에 대한 생각’도 한 몫 할 것이다.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들기 전에 친한 친구의 집을 가봤다면 어땠을까 싶다. 책장에는 어떤 책이 꽂혀있는지, 무슨 게임을 하곤 했는지, 졸업앨범은 버리지 않았는지 등 내가 모르는 친구의 모습을 알 수도 있었을텐데. 요새처럼 연락조차 힘든 시기에는 괜한 후회가 생기곤 한다.

연희동에 필자와 같은 어른이들의 아쉬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줄만한 곳이 있다. 주택의 모습을 가진 상가, 연희동의 ‘은/는’ 이 바로 그 곳이다.

 

내가 꼬마였다면 아마 이렇게 크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아파트에서만 살아본 본인의 눈에 짱구네 집에 온 듯한 이 곳은 신기했다. 서울의 단독주택이라니, 멋지다. 게다가 가정집으로 위장한 탓에 한 눈에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실제로 ‘은/는’이 위치한 거리는 필자에게 매우 익숙한 곳임에도 직접 방문하기 전까진 그게 집이 아니란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大(클 대)문이라기 보다 對(대할 대)문인 ‘은/는’의 대문.

 

연희동의 여느 집과 다를 바 없는 철문을 통해 들어가면 위와 같은 표지판이 반긴다. 가만 보니 대문의 한 짝을 떼어내 뒷면을 꾸민 것 같다. 집을 상가로 쓴 것과 같은 뛰어난 재치가 발휘된 솜씨이다.

‘은/는’에는 총 여섯 개의 상점이 입점해있다. 즉 여러 상점들이 셰어 하우스 형식으로 한 주택을 공유하는 것이다. 유노이아 연희 (여성의류),  사루비아 다방 (차/차살림), 유어마인드 & 원모어백 (서점/천가방), 초콜릿 코스모스 (꽃집/가드닝), 비하인드 리메인 (카페), 그리고 가라지가게 (가구)라는 여섯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은/는’은 주택-상가의 반전매력과 더불어 다채로운 모습을 지닌 공간이다. 필자는 이중 ‘유어마인드’, ‘초콜릿 모스모스’ 그리고 ‘비하인드 리메인’을 방문하였다.

 


작은 공간을 책들이 빽빽히 채운다. 내 친구의 책장도 이렇게 화려할까?

 

2층의 유어마인드에 입장하면 좌측에는 성인 둘 정도 들어갈 정도의 작업실로 보이는 공간이 있다. 분명 개방된 곳임에도 매우 사적인 느낌이 든다. 혼자 민망해지기 전에 얼른 고개를 돌려 서점을 구경해보자. 좁지도 넓지도 않은 공간에 무수한 책들이 즐비해있다. 몇 개의 범주로 구분되는 대형서점의 서적들과 달리 들쑥날쑥한 주제의 책들이 가득하다. 이러한 질적 다양성을 마주하면 한정된 독서를 하는 자신이 부끄러우면서도 새로운 세상에 발을 들일 생각에 기뻐진다. 독서의 권태에 빠져있다면 예상치 못한 말들을 건네오는 이 곳이 즐겁게 느껴지리라 자부한다.

또한 서점답게 음반을 비롯한 몇 가지의 굿즈들이 진열되어있다. 다이어리를 위한 스티커를 살까, 방을 꾸밀 포스터를 살까 고민했지만 역시 책을 사기로 결심했다. 옷으로 따지면 한동안 기성복만 사던 사람이 편집샵에서 눈이 돌아 냉큼 계산을 한 셈. 이렇게 사는 책들이 금방 읽히고 재미도 있다(고 믿고 있다). 책 제목은 ‘최초의 집 – 열네 명이 기억하는 첫 번째 집의 풍경’이다. 친구네 집에 갈 수 없다면 낯선 이의 기억 속 ‘집’을 구경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유어마인드에서 나와 옆 방으로 들어가면 크고 작은 화분에 담긴 식물들이 나를 반긴다. 드러난 벽돌의 내부를 보니 창고로 쓰였던 것 같은 이 곳은 초콜릿 코스모스다. 당이 오를 것 같은 이름과 달리 건강해 보이는 이 곳은 꽃집이 아닌 식물집이다. 꽃이 없는 이 곳은 화려하진 않더라도, 은은한 초록색 잎들이 한데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매력이 있다. 꽃집을 가면 여기저기 할 말 가득한 꽃봉오리 때문에 어디에 눈을 둬야할지 모르겠지만, 초콜릿 코스모스의 식물들은 굳이 시선을 고정시키지 않아도 된다. 긴장하지 않아서 좋은, 어슬렁 거리기만 해도 좋은 작은 우주인 셈이다. 

이 곳을 방문하게 된 계기는 약 한 달 전 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5월이 되고 중간고사를 준비하면서 마음 한 켠이 허전해지기 시작했다. ‘사람을 보지 못해서인가’ 싶었지만 이번 공허함은 묘하게 달랐다. 웃고 떠들기 보다는 바라볼 대상이 필요했달까. 굳이 노력할 필요 없이 멍하니 쳐다만 봐도 괜찮은 게 뭐가 있을까 고민하던 중 꽃이 좋은 것 같아 시험이 끝나면 한 송이 사리라 마음 먹었다.

그런 니즈를 갖고 방문한 초콜릿 코스모스는 정확히 내가 원하던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 일 반드시 내 마음대로 되란 법 없고, 막상 가보니 내 마음은 초록 이파리들에 정화되어 꼬장꼬장한 욕심은 사그라든지 오래였다. 다만 이름도, 성도 모르는 이 친구들 중 누구를 우리 집에 데려가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식물-알못인 내가 쉽게 결정을 내릴 리 만무했고, 그런 내가 가여웠던지 주인(으로 추정되는)분께서 덤덤하지만 친절하게 찾는 것이 있는지 물어보셨다.

 

새 친구. 너가 꽃 피는 날 나도 같이 꽃을 피울거야

 

부끄럽지만 나의 덤벙거리는 천성을 변호하듯 말씀드리며 어떤 식물이 좋을지 추천을 받던 중, 눈에 띄는 친구를 발견했다. 가시가 난 게 얄밉다가도 둥글둥글한 매력이 있는 선인장인 ‘홍기린’이 눈에 들어왔다. 이 녀석에 대해 여쭤보니 한 달에 한 번 종이컵 1/3만큼의 물만 줘도 잘 자란다는 설명이 돌아왔고 안심이 됐다. 좋아, 너로 정했다. 죽이지 않고(?) 잘 키워야겠다고 다짐했다. 혹시 모르겠다 이렇게 화분이 하나 둘 씩 늘어 내 방도 나름의 우주가 될지도.

 

특별할 것 없는 그림. 특별하지 않아서 좋다.

 

해가 지고 적적해지자 연희동에서 자취를 하는 친구를 불러 커피를 마셨다. 오랜만에 그 녀석을 보니 꽤나 반가웠다. 게다가 흔한 커피숍이 아닌 집 같은 분위기에서 보니 반가움이 배가 됐다. ‘뭐하고 지냈냐’는 인사치레부터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속마음까지 주고 받을 수 있는 막역한 친구 덕에 지쳤던 몸과 마음을 한 숨 돌릴 수 있었다.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준 그 친구와 부담없는 대화의 장이 되어준 비하인드 리메인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

차분한 원목 색상의 인테리어로 꾸며진 비하인드 리메인은 유별난 데가 없다. 묘하게 일본 찻집의 느낌이 나는 동시에 친숙하다. 또 유어마인드가 그랬고, 초콜릿 코스모스가 그랬듯이 여기도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러고보니 한 지붕 아래 다른 듯 닮은 상점들이 모여있다는 생각이 들어 재밌게 느껴졌다. 언뜻 보면 비슷한 구석이 없어보여도 결국에는 가족인 우리 집 식구들처럼 ‘은/는’에는 오묘한 통일성이 있었다.

자리는 많지 않지만 오히려 그게 공간의 감성을 살려 준다. 널찍한 프렌차이즈 카페였다면 집에 온 듯한 감정을 느끼기 어려웠을 것이다. 음료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는데 그 맛이 삼삼하다. 번쩍하고 정신을 차리기보다 대화에 곁들일 수 있을 정도의 쓴 맛이다. 아무래도 공간과 음료 모두에 주인 분의 취향이 깃든 것 같다.

구석에 기대 앉아 창 밖을 힐끔거리며 친구와 수다를 떨다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겠더랬다. 하지만 비가 내리기 시작하니 은연 중에 밀린 할 일이 떠오르고 비를 맞고 싶지 않아 다급해진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친구와는 다음 약속을 기약했고 ‘은/는’에게는 잘 놀다 간다는 인사말을 전했다.

 

 

대학친구를 만나고 나니 연락이 끊긴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이 떠올랐다. 그중에는 나를 선뜻 집으로 초대했던 친구들도 있다. 그때마다 나는 한사코 거절했다. ‘편한 우리집을 놔두고 굳이 남의 집에 가야만 하나’라는 생각에서였다. 나를 부르기 위해 부모님의 허락까지 받는 수고를 감수했던 녀석들에게 어쩌면 잔인한 처사였을 것이다. 그걸 모르지 않았지만 당시에는 불편함을 이겨낼만한 의미가 없다고 여겼었다. 그러던 모진 아이는 커서 마음속으로 친구네 집을 서성이는 어른이 되었다. 그 친구들 그리고 그들의 집은 여전할 지 궁금해지는 5월이다. 


[연희동 은/는]
위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로 11라길 10-6

영업시간

  1. 유어마인드. 13:00 ~ 20:00
  2. 초콜릿 코스모스. 10:00 ~ 22:00
  3. 비하인드 리메인. 12:00 ~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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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이글루

잔치의 시선으로 신촌의 장면과 사람, 장소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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