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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CE 2020 · 05 · 20

132. 책바

Editor 조밀

열다섯 무렵, <호밀밭의 파수꾼>의 마지막 장을 막 끝낸 한 소녀의 소감은 어처구니 없게도 ‘술 마셔보고 싶다!’ 였다. 참나, 술에 대해 뭘 안다고. 모두가 잠든 밤, 뉴욕의 한 바에서 재즈를 들으며 홀로 스카치 위스키를 마시는 홀든의 모습이 괜히 멋있어 보였더랬다. 그 소녀는 무럭무럭 자라 어느덧 스물 두 살이 되었고, 여전히 책에 술만 등장하면 술이 고파지는 어른이 되었다. 

 

 

 

2월의 어느 날, <노르웨이의 숲>을 읽던 그 때도 어김없이 술이 날 유혹했다. 순전히 ‘미도리’라는 등장인물의 이름 때문이었다. 언젠가 칵테일 바에서 보았던, 마셔본 적도 없는 ‘미도리 사워’가 떠올랐달까. 위스키 향 짙은 이 책을 약간의 취기와 읽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불현듯 ‘책 읽을 수 있는 바’를 구글에 검색했다.

 

 

 

‘책과 술의 공감각을 구현하는 바 & 서점, 책바.’ 

 

 

 


빙고, 여기다. 

 

 

 

 

 

 

한참을 돌고 헤메다 마침내 도착.

 

 

 

 

 

 

 

 

 

 

 



이 곳은 건물을 찾기가 쉽지 않다. 입구를 찾기는 더더욱 쉽지 않다. ‘책바’라는 입간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 외관 상 그 어디에서도 여기가 바임을 알 수 있는 단서가 없다.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머뭇머뭇 문을 열면, 책장에, 잡지 가판대에, 술집이라고는 짐작도 되지 않는 인테리어가 시야에 들어온다. 잘못 찾아왔나? 가게가 없어졌나봐. 식은 땀이 나려던 찰나, 등지고 있던 누군가가 돌아보더니 묻는다, ‘혼자 오셨어요?’

 

 

 

알고 보니 그 뒷모습은 사장님이셨고, ‘책바’라는 이름에 걸맞게 책을 읽고 계셨다. 생경한 풍경에 두리번 두리번 돌아보는 와중에 사장님이 ‘오늘 첫 손님이십니다.’라는 말과 함께 책 한 권을 건네며 책장 옆의 버튼을 누른다. 해리포터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책장이 열리고, 그제야 바 테이블과 의자와 술병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이게 내가 아는 바의 풍경이지. 


 

 

 

 

 

 

 

 

 

 

 

밤에만 술 마시란 법은 없다. 
사실, 낮술은 하루를 살만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적당히 구석진 곳에 자리잡은 후 사장님이 건네주셨던 책 형태의 메뉴판을 펼쳐보았다. 이거, 은근히 재밌다. 메뉴판을 이렇게까지 정독해본 적이 없는데, 마치 바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사장님이 책에 영감을 받아 개발한 술, 소설 속에 등장하는 술, 시 또는 소설을 읽으며 마시기 좋은 술 등 메뉴가 다양하다. 한참을 찬찬히 읽어보다 <노르웨이의 숲>을 발견하고 바로 보드카 토닉을 주문했다. 미도리가 삶이 괴로울 때마다 마신다는 보드카 토닉. 비록 미도리 사워는 아니었지만, 뭐 어때. 라임이 동동 떠다니는 덕분에 미도리 사워만큼이나 초록빛이 도는 보드카 토닉이었다. 



 

 

 

Keep Calm and Drink a Book

 

 

 

 

 

 

 

 

 

 

 



시원한 유리잔 속 얼음을 잘그락거리며 옅게 들리는 재즈와 함께 보드카 토닉을 한 모금 마셨다. 조용하게 술을 마신게 얼마만일까. 소주를 먹든, 칵테일을 먹든, 술은 음미가 아닌 목을 축이기 위함이었다. 주변의 소음을 뚫고 내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악을 쓰다시피 수다를 떨곤 했다. 하지만 이 곳에서는 카뮈가, 헤밍웨이가, 셰익스피어가 매서운 눈으로 우리의 데시벨을 감시한다. ‘소곤소곤’. 인위적인 적막이 차갑다기보단 되려 미지근한게 기분이 묘해진다. 덕분에 손님들은 일행과 작게, 또는 자기 내면과 고요하게 대화를 나눈다. 


 

 

 

취한 사람 금지

 

 

 

 

 

 

 



생각의 파도는 적막한 공기의 흐름을 타고 한없이 일렁인다. 평생 아무 걱정없이 한 손에는 술을, 다른 손에는 책을 들고 살았으면. 보드카 토닉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잡념은 유리잔 속 올라오는 기포마냥 방울방울 수면 위로 떠오르기 마련이라, 어느새 책이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까지 곱씹어보고 있었다. 학창시절 내내 생활기록부에 독서가 취미라고 쓸 만큼 평생 책을 좋아한다 생각해왔지만, 막상 손꼽아보면 부끄럽게도 제대로 읽은 책은 정작 몇 안 되는 것 같다. 어쩌면 난, 긴 호흡으로 책에 몰두할 수 있을 만큼 여유로운 시간을 좋아한 게 아니었을까.

 

 

 

끊임없이 뛰고 있지만, 빠르지 않아 불안하다. 가끔 쉬어가도, 눈으로는 나를 앞지르는 다른 이들을 좇고 있다. 왜 나는 남들보다 느리지? 왜 뛰는 자세가 어정쩡하지? 나를 괴롭히는 생각들은 무궁무진하게 샘솟는다. 스물 두 살, 이제 시작인데 벌써 지친 기분이 든다. 무거운 마음으로는 책을 못 읽는다, 덮자. 술 마시며 읽어보겠다고 호기롭게 가져간 <호밀밭의 파수꾼> 은 잡다한 고민들이 훼방을 놓는 바람에 겨우 한 두 장을 넘겼을 뿐이다.

 

 

 

이럴 때 술은 훌륭한 묘약이다. 달콤쌉싸름한 맛에 취해 다른 걸 잊고 오로지 눈 앞의 책에만 몰입하게 하니까. 남은 술을 모조리 들이켰다. 잡념을 담은 방울들은 목으로 넘어가고 몸 속에서 분해되어 사라진다. 기분 좋은 취기는 간만의 여유로움을 가져다 주었고, 어느새 나는 고민들을 뒤로 한 채 홀든의 독백에 빠져들었다. 삶이 괴로울 때 보드카 토닉을 먹는 미도리가 조금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술을 다 마시고 나가려는데 입구 옆 칠판에 쓰여진, 어떤 멋진 손님이 ‘술을 마시며 쓴 글’을 발견했다. 책바에서는 정기적으로 글쓰기 공모전을 여는데, ‘2019년’을 주제로 한 공모전의 당선작이라 한다. ‘모두의 속도에 맞춰 재빠르지 않아도 됩니다.’ 일리 있는 말이다. 내 속도. 나는 어느 정도 빠르기로 가고 있는걸까, 글을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며 고민하다가 이내 ‘뛰어가든 걸어가든 돌고만 있다면 그걸로 되었다’ 라는 생각에 그만두고 가게를 나왔다. 문을 열고 나오는 발걸음이 못내 가볍다. 하늘을 바라보니 별 하나가 희미하게 빛난다. 너도 너만의 밝기로 빛나고 있는 거겠지.

 

 

 

돌다가 힘들 땐,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책바를 찾아야지. 지칠 땐 독한 술을, 우울할 땐 달달한 술을 마셔야지. 그리고 은은하게 퍼지는 재즈 음악을 들으며 숨을 가다듬어야지. 


 

 

 

나이를 천천히 먹는 대신 오래도록 젊을 수 있다

 

 

 

 

 

 

 

책바
서울 서대문구 연희맛로 24 1층 101호
화-토 19:00 – 01:30 
일, 월 휴무

 

 

 

 

조밀
AUTHOR PROFILE
조밀

잔치의 시선으로 신촌의 장면과 사람, 장소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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