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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CE 2020 · 12 · 09

148. 바벨의 도서관

Editor 냠

내가 망쳐버린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내 능력이라 자부했던 것들은 내 것이 아니었고, 돌이켜보니 그건 얕음을 감추기 위한 위장이었다. 결국 얄팍함이 고작인 스스로에 대한 한탄만이 남았다.

남은 것이 없는데 퍼내야만 한다. 그러니 어떻게든 채워야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나는 요란하게 메말라갈 뿐이다. 바닥이 보일 때까지 졸아든다. 타닥, 타닥- 하고.

내 바닥엔 그을음이 남는다. 

 

 

 

언젠가부터 나의 ‘변론서’를 찾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보르헤스가 쓴 단편 소설 ‘바벨의 도서관’에는 한 도서관이 등장한다. 여기에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담은 책들이 있다고 했다. 별 볼일 없는 것만을 담은 책에서부터 미래의 상세한 역사를 다룬 책, 대천사들의 자서전, 진실과 진리에 대한 책, 진실과 진리의 주석에 대한 책까지….

그 중에서도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한 사람만을 위한 변론서였다. 내 모든 행위에 대한 모든 변론이 담겨있는 나의 책. 잡히지 않는 미래 속 희망을 찾아줄 미지의 세계. 이것만 있다면 새카맣게 타버린 그을음도 지금보단 초라하지 않게 될 수 있을까. 아니면 아예 뽀득뽀득 닦여 윤기나는 모습으로 바뀔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드디어 ‘바벨의 도서관’에 도착했다.  소설 속 그 도서관이 아닌, 연희동에 있는 무인 스터디 카페로. 이내 책 몇 권을 쑤셔넣은 가방을 짊어진 채 문을 열고 성큼 들어간다. 시간이 닿지 않는 장막이 쳐진 듯 언제나 불이 켜져 있는 이곳에.

 

 

 

창가에 자리를 잡고 눈 앞의 유리창에 시선을 던진다. 붉은 벽돌, 철제문, 시멘트가 평평하게 발린 마당이며 대문 옆에 엉성하게 자라있는 장미 덩굴까지. 어릴 때 살던 골목길 속 집들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든다. 이곳에 있으면 평온하고 차분한 기분이다. 짙은 색 나무판자와 식물 장식, 따뜻한 빛깔을 띤 조명들로 꾸며진 이 공간 특유의 인테리어 덕인지도 모르겠다. 또 좌석이 많지 않은 대신 자리가 널찍해서, 비치되어 있는 차나 커피를 마시며 멍때리기에도 좋은 곳이다. 그래서 갈 때마다 평온한 마음으로 창 밖을 보곤 했다. 오늘도 평소처럼 조용히 창 밖을 바라보니 허옇고 차갑기만 한 햇살에도 자꾸만 눈꺼풀이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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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했다. 얼마나 잔 거지? 시간이 한참 지난 듯한 감각에 섬찟했다.

“항상 너를 보고 있었어.”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드디어 정신이 나간 게 아닐까?

“응 그거 아니야.”

여기 업종이 바뀌었나? 스터디 카페에서 방탈출이나 테마파크 같은 걸로.

“..넌 참 낭만이 없구나.”

 

이곳은 너의 도서관, 너의 세계야.

 

그 요상한 목소리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찾는 책을 품고 있는 ‘도서관’은 무한하고, 영원하며 이 거대한 도서관의 일부가 똑 떨어져 계속 떠돌다 연희동에 도착했다고. 나를 위해 여기에 온 것이라고.

왜?

“네가 가지 않는 방들 모두 너를 위한 거니까.” 

‘바벨의 도서관’은 문을 열고 들어오면 바로 보이는 좌석들과 세 개의 방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시야가 탁 트인 곳에 있는 게 더 좋아서 방 안에 들어간 적이 거의 없었다. 

창가자리만 앉는다고 뭐라 하는 건가. 혹시 내 자리를 노리는 다른 사람들의 음모가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꿈을 꾸었던 건지 그냥 바보 같을 만큼 뭐든 잘 믿기 때문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 목소리의 말을 믿었다. 

책 속에서 읽었던 그 도서관, 기억과 진실과 거짓을 비롯한 모든 것이 있는 공간. 그 공간 속 일부가 떨어져나와 이곳 연희동에서 내게 말을 걸고 있다고. 

 

지금부터 써 내려갈 것들은 이 공간 안에서 내가 보았던 기억의 장면들이다. 사실 글로 써낼수록 회상은 공상이 되고 확신은 희미해졌다. 아직도 모든 것이 부정확하다. 추억인지, 환각인지 아님 눈부신 폐허인지.

 

 

 

 

너무 쉽게 바스러질 것들에 마음을 줘버리곤 했다.

허파로 들이마시는 숨조차 끊임없이 나를 떠나니, 곧 바스라질 것을 곁에 둔다는 건 삶의 진리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저 우연이거나.

그러고 보니 태어날 때는 호흡하는 법조차 모른다던데, 용케도 매 순간 빼먹지 않고 숨 쉬며 살아가고 있다. 들숨날숨, 가끔은 하품이나 깊은 한숨으로. 세상 밖으로 처음 나와 작고 여렸던 그 시절 어떤 마음으로 첫 호흡을 했을까. 아마 몇 달간 좁고 따뜻한 자궁 속에서 계속 들어온 심장박동, 다정한 목소리를 떠올리며 용기를 내 숨을 들이마셨을 것이다. 그 다정함을 마주할 앞으로의 순간들을 기대하면서.

하지만 첫 용기는 끝없는 미로, 그리고 두려움의 시작이기도 했다. 그까짓 거 뭐 겁낼 게 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끊임없이 들이마시고 내쉬어야 하는 삶이 버거울 때가 많았다. 네모난 방 안에서 겨우겨우 호흡하는 식물처럼. 

 

 

 

그런 내 모습이 이곳에 있었다. 남들 다 하는 것조차 못하겠다고 숨을 헐떡거리는 새싹에게 햇볕을 쬐어주고, 수돗물을 받아 독한 성분이 날아가도록 며칠 간 햇볕에 내놓은 뒤 꼬박꼬박 물 한 컵씩 따라 흙을 적셔주고, 추운 날엔 얼지 않게 집 안에 들여놓는 그 모든 것을 해준 사람도 있었다. 생애 처음 나를 불렀던 다정한 목소리, 열 달 남짓한 시간 동안 들었던 심장박동의 주인이다. 나의 어머니. 

 

 

 

사랑이라는 말끔하고 둥글한 단어로 퉁치기엔 너무 깊고 복잡하게 누덕누덕한 감정들이 모여 조그만 씨앗을 자라게 했고, 자라난 줄기와 뿌리, 이파리의 주위를 둘러싸는 창문과 벽이 되었다. 벽면엔 환하게 크라고 마음의 색을 담아 알록달록한 그림을 걸어놓으면서. 사실 그 벽이 갑갑하고 미운 적도 있었고, 아직도 벽을 쌓아올린 돌의 질감에 종종 슬프고 아프고 까끌하다. 이 모든 게 한데 모여 넓찍한 유리창처럼 투명한 감정이 되었다. 때로는 차갑고, 미지근하지만 어찌됐든 외면할 수 없는 반짝거림. 

그래서 알 수 있었다. 나를 가장 먼저 불러준 사람. 그가 키운 식물이 이곳에 자리를 잡고 천장까지 닿을 만큼 자라났다는 걸.

 

 

 

다른 방을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건 네모난 액자 속 새까만 눈동자였다.

생각해보면 살아가면서 수많은 눈동자들과 눈을 맞췄다. 슬쩍 눈인사만으로 스쳐지나가기도 했고, 짧은 시간 눈 맞추다 이내 눈을 감고 영영 내 곁을 떠난 눈동자도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여기에 있었다.

몇 년 전 가족 중 한 명이 데려온 강아지는 눈이 구슬처럼 까맣고 예뻤다. 그렇게 예뻤는데 원래부터 몸이 약했는지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오묘한 초록빛 눈동자를 가진 어린 고양이도 한때 나의 가족이었지만 그 시간은 짧았다. 병원에 가보니 길을 떠돌다 온 아이였어서 그런지 원래 약한 심장을 타고났다고 했다. 조그만 햄스터들도 몇 년을 살다 어느 날 눈을 꼭 감고는 다시 뜨지 않았다.   

친해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너무 쉽게 떠났다. 계속 이 네모난 방 안에만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밖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느라 나는 기회를 놓쳤다. 더 오래 눈 마주치고 다가갈 기회를. 생각해보면 이런 일이 참 많았다. 너무 쉽게 곁을 떠나거나 의미없는 말을 흩뿌리며 외면했던 수많은 날들이 떠올랐다. 눈을 마주치며 오래도록 있었더라면 좀 달랐을까? 

후회가 들 때마다 최소한 내 안에 새기고 있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기억하겠다는 다짐은 매번 무뎌지고 이렇게 오지 않던 곳에 와서야 불쑥 고개를 드민다. 어느새 나를 떠난 이들을 잊고 결국 나만 남았던 거다. 현재만을 살아간다는 게 조금 슬프게 느껴졌다.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그림 속 눈동자는 계속 이쪽을 보고 있었다. 밖으로 나올 수 없는 네모난 액자틀 안에서 보는 나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눈동자들을 생각하며 많이는 아니어도 종종 생각하고 있다고 마음속으로 말해주었다.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그동안 묻어둔 것들의 목록을 적어보았다.

나를 부르던 목소리, 누군가가 준 물 한줌, 남몰래 자라던 식물, 사료를 게워내더니 그 다음날 죽어버린 나의 강아지. 콩닥콩닥 심장 뛰는 소리를 내던 모든 것들. 다 나의 책을 써준 것들이었다.

 

방에서 나오니 슬며시 아까의 그 목소리가 다시 속삭였다. 

 

진실은 언제나 무한하고, 어느 곳으로 가도 길을 찾을 수 있어. 무한함은 하나의 원과 같아서 어떤 길을 택하든 그것의 둘레를 더듬으며 나아가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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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떠보니 모든 게 그대로였다. 희미하게 빛나는 햇살도, 창 밖 풍경도.

나는 여전히 바벨의 도서관에 있었다. 

 

 


                       바벨의 도서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310-4

          영업시간: 24시간(현재는 방역 조치로 21시까지 영업)

          연락처: 010-5904-5760

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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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뭐 있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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