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성
미완성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만은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이상_거울 中

물웅덩이 속의 신촌
형편없이 반사된 물웅덩이에서도 신호등의 빛은 미약하게나마 반짝거린다. 나는 오랫동안 그 안을 들여다본다. 눈 앞의 신촌을 본땄음에도 영 다른 장소처럼 느껴지는 그곳을. 울렁거리는 세계의 왜곡된 이미지에서 도통 눈을 뗄 수가 없다. 실속 없이 스캔된, 바닥에 비친 신촌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자 표면이 한번 더 일렁인다. 원형으로 퍼지는 잔물결을 따라 수면 위의 내 얼굴도 일그러진다. 그러나 사정없이 흔들리는 수면의 유약함이, 쉽게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는 잔상이 내게는 오히려 편안하다. 그보다는 매끄러운 거울에 잔잔하게 비친 얼굴을 나는 더 견디지 못한다.
거울 속의 눈동자를 오래 쳐다보는 일은 괴롭다. 거울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그 안에 영혼을 빼앗긴다는 어떤 유치한 괴담 때문일 수도, 아니라면 한 손에 거울을 든 채 허영이나 나르시시즘을 대표했던 명화 속의 인물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거울 속의 나는 영혼이라곤 없는 껍데기처럼 보인다. 그 적막과 마주보는 일은 기묘하다. 이쯤에서 이상의 시가 떠오른다.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고 ‘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인 거울 속의 나를 말하는 구절이. 평면 너머의 껍데기에서 자신의 분열된 모습을 읽는 것이 그에게도 공포스러웠으리라 짐작해본다.

봄 바다
올해 봄에는 바다에 갔었다. 친구와 보폭을 맞춰 걸으며 서로의 영상을 찍었다. 비디오 속의 시험판 로봇처럼 뚝딱거리는 나는 낯설었다. 껍데기만 남은 듯 했던 거울 속의 나와 마찬가지로. 녹화됨을 상정한 화면 속에서 움직임은 부자연스럽다. 내가 화면 속의 나와 낯을 가리듯이, 화면 속의 나 역시 카메라 렌즈로 상정되는 누군가를 낯설어한다. 나는 카메라를 의식하며 고개를 숙인다.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는 어쩡쩡한 폼으로 카메라맨을 앞지른다. 화면 속의 나는 어설픈 배우처럼 나 자신을 흉내낼 뿐이다. 나를 어떻게 하면 제대로 볼 수 있을까? 거울 속의 껍데기뿐인 나와 비디오 속의 로봇 같은 내가 모두 이생명체처럼 느껴진다면 내 본질은 어디서 포착되는 걸까?
내가 나를 알 수 없다면.

Hole의 Celebrity Skin
그 이생명체 같은 내가 정말 나인가? 타인의 시선은 나를 정확하게 보고 있을까? 그들의 시야가 나보다는 대담하고 고집스러움이 분명하다. 익명의 경우에는 더더욱. 한때 명성을 떨쳤던 록스타 커트 코베인의 딸 프란시스 코베인이 자신의 어머니인 코트니 러브를 옹호했더라는 가쉽 기사에 달렸던 하나의 댓글이 인상적이었다.
”너는 네 어머니를 잘 모르는구나.”
-바다 건너 한국에 살고 있을 확률이 높은 익명의 누군가(아마 그는 코트니 러브를 실제로 만난 적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코트니 러브를 잘 알고 있을까. 그의 딸 프란시스가 아니라면 누가? 그보다도 익명의 누군가가 그를 더 잘 알까? 코트니 러브 자신보다도? 숱한 의문이 생기긴 하지만 아무튼 익명 댓글의 말은 진실일 테다. 적어도 그가 그렇게 믿고 있다면, 그 개인에 한해서는.
나는 진실은 하나가 아니라는 말에 동의한다. 그 사람의 진실은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진실이 있을지언정, A에겐 A의 진실이 있고 B에겐 B의 진실이 있다. 나는 내가 스스로를 보다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사실에 의문을 가졌지만, 이제와서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으리라. 거울도 비디오도, 하다못해 타인의 시선에서까지 결국 온전한 하나의 존재는 없다. 나는 어디서나 분열된 채로 존재한다. 나에 대한 진실은 과거와 현재가 모두 다르며 여러 사람들 틈에서 계속 중첩되고 변주된다. 새로고침 되는 스캔들 기사의 댓글창처럼.
나는 나를 온전한 하나로 정의하는 일에 흥미를 잃었다. 분열된 채로 살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살아있는 이상 나는 모두에게 다 같은 사람으로, 불변하는 고정된 어떤 이미지로만 여겨질 수는 없다. 좋은 사람이 아니면 나쁜 사람이라고 단정지어질 수 없다. 나는 거울 안의 평면적인 껍데기도 아니고 비디오 안에서 반복재생되는 조트로프도 아니기 때문이다. 받아들이는 모두에게 각각 다른 인상을 남기는.

완성 중인 초상, 라나 델 레이
최근 소중한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취미가 생겼다. 눈앞의 사람과 대화하며 보이는 대로 그리기도 하고, 사진을 오래 들여다보며 그리기도 한다. 이 모든 작업에는 대상을 꼼꼼히 지켜보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관찰은 항상 다른 시각을 갖게 하기에, 스케치에 집중하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애정을 가지고 들여다보는 일은 당신에 대한 나의 진실을 다듬는 일과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겠다고.

6월 초는 애매한 날씨의 연속이다. 여름의 초입에서 더위가 스멀스멀 밀려오고 답답한 하늘이 열기를 뿜어낸다. 구름이 방금 닫힌 무대의 커튼처럼 하늘을 덮고 있는데, 햇살은 아직 그렇게 따갑지 않아 견딜만 하다. 오히려 이르게 에어컨을 튼 카페의 내부가 서늘할 정도다. 유리창 너머로 내려다 본 신촌의 풍경이 복잡하다. 천천히 흔들리는 나뭇잎과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대비가. 창문 너머의 각종 소음과 카페 안의 잔잔한 음악 소리의 대비가 묘하다.
신촌에 올 때면 한 번쯤 지나쳤던 교차로의 빨간 잠망경앞에서부터, 평소에는 잘 가지 않던 외곽의 길을 빙 둘러 걸었다. 백화점에 진열된 새 물건과 벤치 앞에 쌓인 쓰레기는 모두 신촌의 이름 아래 하나로 묶여 있다. 좁지 않은 공간에 뒤엉켜 존재하는 도회적인 아름다움도 널브러진 문명이기의 잔해도 모두 신촌이다. 인간과 공간은 모두 크고 작은 야누스의 집합체가 아닐까, 신촌의 초상은 아직 미완성이다.
[…] 것 같아요. 미완성에서 댓글 이야기를 했잖아요. 처음에는 제3자가 “너는 네 어머니를 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