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2. 신촌에서 길을 잃는다는 것
유난히 뜨거운 햇빛이 정수리를 달구던 수요일 점심. 연세대학교 위당관 앞 나무 벤치에 앉아 유선 이어폰으로 느린 하루를 만끽하는 한 여자를 만났다. 낮게 드리운 나뭇잎 사이로 봄의 햇살이 느릿느릿 흔들리던 날. 미안한 마음 반, 기꺼운 마음 반으로 그의 여유를 방해했다.
안녕하세요, 제가 지금부터 3시간 공강인데 시간을 보낼 만한 장소를 추천해 주실 수 있나요?
3시간이요? 와, 어쩌다 그런 비극적인 일이… (웃음)
영화 좋아하시면 라이카시네마는 어때요? 연희동에 있는 작은 영화관인데, 여기서 도보로 15분 정도 걸리거든요. 시간대만 잘 맞으면 영화 한 편 보기엔 충분할 것 같은데요.
영화 좋아하시나 봐요.
네. 개인적으로 영화를 좋아하기도 하고, 제가 서문에서 자취하는데 저희 집이랑 진짜 가까워서 라이카시네마는 특히 자주 가요. 그리고 요새 다른 게 아니라 영화값이 금값이잖아요. 얼마 전에 CGV 갔는데 만 육천 원인가? 만 사천 원인가? 리클라이너 좌석도 아닌데 너무 비싸더라고요. 그에 비해 라이카시네마는 칠천 원이니 비용적인 측면에서도 부담이 없어요.
라이카시네마가 다른 영화관이랑 다른 점이 있을까요?
크게 다르진 않아요. 오히려 금전적인 부분을 제하면, 다른 영화관을 놔두고 라이카시네마를 추천할 만큼 장점이 크진 않죠. 상영관도 2개뿐이고, 상영관 내부도 협소한 편이라서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용아맥 대신 라이카시네마에 가고, 집에서 편하게 넷플릭스를 트는 대신 실재하는 공간을 찾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믿어요. 저 같은 경우는 거기서 상영하는 영화 라인업이 그 이유인 것 같아요. 독립영화나 예술영화도 많고, 오래된 고전영화도 자주 상영하거든요.
말씀하시는 게 영화 전문가 같으세요. 라이카시네마에서 본 가장 인상깊었던 영화 하나를 꼽아보신다면요?
그렇게 봐 주시니 감사하지만, 말은 이렇게 해도 영화를 엄청 깊이 이해하면서 보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잘 모르겠는 영화가 훨씬 많거든요. (웃음) 대신 영화 그 자체보다도,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사색하는 시간이 더 소중한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건 지지난 주에 본 <센티멘탈 밸류>가 아닐까 싶네요.
<센티멘탈 밸류>를 꼽으신 이유를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노르웨이 영화인데, 거기서 이런 대사가 나와요. “누가 그러는데 기도는 신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절망을 인정하는 거야.” 맞는 말이죠. 그 말이 뇌리에 깊게 남은 채로 나왔는데, 연희동 골목이 이상할 정도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가로등 불빛도 희미하게 번지고, 그날 마침 비가 왔어서 비 냄새도 나고. 괜히 영화 속 인물이 된 기분이었달까요. 결국 그날은 집까지 일부러 빙빙 돌아서 걸어갔어요. 영화 내적인 것보다도, 그런 시간들이 좋아서 영화를 자주 챙겨보게 되는 것 같아요. 제가 제 시간을 온전히 쓰는 거니까요.
라이카시네마가 일종의 포탈 같네요. 현실에서, 다른 차원으로 이어주는.
포탈. (웃음) 네, 맞아요.
보다 정확히는 도피처? 근데 막 거창한 의미의 도피처는 아니고요. 사람들 사이에서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공간이라는 의미에서요.
누군가의 도피처.
그곳에서는 일본 영화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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