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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CE 2020 · 10 · 14

141. 몰리스

Editor 냠

이곳과의 인연은 한 물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몰리스를 몰랐다고?” 

그렇다. 진짜 몰랐다. 친구의 물음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골목을 지나다 언뜻 본 듯도 했다. 그곳은 2층에 있어서 길을 걸을 때 흔히 갖는 시선보다 약간 위쪽에 있었고, 굳이 시야의 한가운데에 담아 둘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 그곳의 존재를 초점이 흐려진 배경처럼 희미하게 떠올렸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제대로 쳐다본 적조차 없었다는 게 왠지 미안했던 걸까, 몰리스를 한 번 간 이후 창서초 앞 골목을 지날 때면 살짝 고개를 들어 그곳을 바라보곤 했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골몰하고 고심하며 살아가는 세상은 딱 160센치 정도의 높이였다. 그렇기에 어중간한 높이에, 어중간하게 가까운 건물은 그저 내 걸음의 반경 밖에 머물렀다. 높이 올려다볼 하늘도 아니고, 내가 살아나갈 지표면도 아닌 애매함으로. 

 

그렇게 시간이 흐른 현재, 길거리의 모습은 많이도 바뀌었다. 사람들은 코와 입을 덮어 하나의 보이지 않는 공간을 만들었다. 저마다 비좁은 하나의 공간을 가졌으니 바깥세상 속 공간들은 힘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이 상실을 메우려는 듯 마스크, 컵, 그릇…. 수많은 것들이 한번 쓰이고는 곧장 버려지고, 쌓이고, 태워지고, 용케도 조각조각 살아남아 생명들의 숨통을 조였다. 하루하루 숨 쉬듯 벌어먹고 사는 평범한 이들도 줄어든 일상의 반경만큼 조여든 숨통을 붙잡고 땅 위를 떠돌았다. 이 희대의 역병에 너 하나 걸려버리면 우리집이 망한다는 부모님의 무시무시한 경고를 듣고는, 몇 번 정도 길거리 벤치에서 김밥을 씹어먹으며 생각했다. 나도 떠돌고 있구나.

길거리는 ‘뱉어내는’ 것들로 가득했다. 담배연기, 발자국, 혹은 서둘러 뛰어가는 이들의 땀방울같은. 끊임없이 뱉어지고 흩어지는 그 모든 것들을 보고 있자니 하릴없이 휩쓸리는 것만 같았다. 나의 세상은 지표면 위에 딱 붙어있어서, 길가 위의 모든 흩어짐이 생생히 보여 더 공허했다. 그래서 몰리스의 그 ‘어중간함’이 일종의 피난처로 느껴졌다. 적어도 저 곳에선 내 김밥을 노리는 비둘기로부터 안전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오랜만에 창서초 앞 골목을 지나니, 전에는 분명 닫혀있던 몰리스의 창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꼭 이리 오라고 손짓하는 것만 같았다. 그 손짓에, 이곳을 가는 건 운명이라고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나는 몰리스에 다시 오게 되었다.

 

다시 만난 몰리스

계단을 오르니 ‘MOLLIS story’라는 글자와 함께 사진이 잔뜩 붙여진 벽이 눈앞에 있었다. 사장님의 경력들이 줄줄이 적힌 종이, 지금까지 했던 인터뷰, 만들었던 케이크들의 사진들과 함께 모든 디저트를 직접 만든다는 자부심 어린 문구가 벽면 한 구석에 쓰여있었다. 몇십 년 간의 일들이 한곳에 모여있는 그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어서 잠시 바라보다 안으로 들어섰다.

 

신촌-뷰

문을 열자마자 눈앞에 널찍한 창문이 보인다. 이곳에 다시 오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기둥을 제외하면 벽 대신 아예 창문으로 되어있어서 바깥 풍경이 시원하게 탁 트여있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이곳이 실내인지 실외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다. 왼쪽 창문 너머로는 초등학교가, 오른 창문에는 파이홀이 있는 골목 그리고 저 멀리 유플렉스가 보인다. 한참을 구경하다 저 아래에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곳을 바라보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무언가 들킨 것만 같은 괜한 머쓱함에 케이크로 눈길을 돌렸다.

 

딸기 알리앙. 그림을 그린 듯한 플레이팅이 일품이다.

 

첫 번째 케이크 – 폭신하고 말랑한, 딸기 알리앙

말린 딸기조각과 딸기 생크림, 밀크무스크림, 초코브라우니, 그리고 아몬드 타르트가 층층이 쌓인 ‘딸기 알리앙’이다. 한입 떠먹는 순간 직감했다. 이곳은 생크림 맛집이 틀림없다..! 메뉴 설명글을 안 읽었다면 생크림인줄도 몰랐을 거다. 미끌하고 느끼한 유지방 느낌이 아니라 폭신한 머랭 같았다. 생크림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말랑하면서도 산뜻한 맛이었다. 구름 위를 걷는 듯한 사뿐함이 느껴지는 맛이라고나 할까. 타르트, 무스크림도 그렇고 꾸덕함의 대명사인 브라우니도 찐득한 단맛이 아니라 담백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이 담백함이 말린 딸기조각의 상큼함을 더 돋보이게 만들어준다. 케이크를 구성하는 각 층들은 식감, 맛, 향까지 서로 달랐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 조화가 안정적이었다. 

 

사실 맛도 맛이지만 시각적으로도 조화롭다. 몰리스의 케이크에서 눈에 띄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시각적 요소 즉 케이크의 깔끔한 디자인과 플레이팅인데, 산딸기와 망고 시럽, 초콜릿 소스가 그릇 위에서 그 존재감을 발휘한다. 특히 과일 시럽이 꼭 수채화같다.

생크림부터 시럽까지 케이크를 이루는 하나하나가 다 몽글하고 담백하고 맑았다. 그래서인지 케이크를 먹으며 내가 느낀 몰리스의 인상은 파스텔톤 수채화같은 빛깔이었다. 지나치게 강렬하거나 끈적거리지 않고 부드럽고 투명한 느낌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창틀에 있는 비행기 소품이 보였다. 그 옆을 보니 세계지도, 자전거와 오토바이 모형, 그리고 화려한 색감의 자동차 일러스트가 벽면에 걸려 있었다. 케이크에서 느낀 포근함과 진취적인(?) 소품들의 묘한 충돌에 잠시 당황했다. 소품들만 보면 지금 당장 자리를 박차고 세계일주라도 떠나야 할 것 같았다. 알고보니 세계지도는 여행을 좋아하는 가족을 위해 사장님이 직접 붙인 것이라 한다. 여쭤본 건 아니고, 계단 앞 벽면에 붙은 종이들을 살펴보다 알게 됐다. 

 

몰리스의 이야기는 한 사람의 과거이자, 현재이며, 가족에 대한 애정이기도 한 듯하다. 이 모든 것들이 흩어지지 않고 층층이 쌓일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층을 이루는 요소 하나하나가 몰리스 그 자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꽤나 상이한 것들도 하나의 이야기 속에 녹아들어 부드럽고 몽글한 안정감을 자아내는 것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니 왜 딸기 알리앙을 이루는 각 층들이 유달리 서로 조화롭게 담백하고 말랑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사장님이 직접 쓰신 듯한 글씨가 세계지도 이곳저곳에 적혀있다

한 층 한 층 알아갈수록, 이곳은 내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숨겨져 있었다. 그 속의 깊이를 알 수 없어 호기심을 일으키는 사람처럼, 한 번만으로는 이곳에 대한 글을 제대로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이곳에 들러보기로 결심했다. 사실 케익이 먹고 싶었다 이곳은 기본적으로 음료를 테이크아웃용 컵으로 내주기 때문에 오랫동안 마실 셈으로 텀블러를 챙겨갔다. 이번에는 초콜릿 케이크를 먹겠다고 다짐하면서.

 

 

두 번째 케이크 – 반짝이는 달콤함, 실론

저번과 똑같은 창가 자리에 앉아 포크를 들었다. 이날의 주인공은 산딸기 시트와 얼그레이 크림을 밀크초콜릿으로 감싼 ‘실론’이다. 백금인지, 은인지 은빛으로 반짝거리는 케이크 위 장식이 은하수 같아 먹기 아까울 정도였다. 하지만 감성도 식후경이기 때문에 몇 장 찍은 뒤 바로 포크질을 시작했다. 

 

케이크 위의 은하수

겉면의 초콜릿은 진하고 달달하지만 연하고 담백한 얼그레이, 적당히 산뜻한 산딸기 시트가 같이 있어 단맛이 모든 걸 압도하진 않는다. 분명 단독으로 먹었을 땐 밀크초콜릿 특유의 끈끈한 단맛이 느껴지지만 그리 부담스러운 맛은 아니다. 달지만 지나치지 않고, 얼그레이 크림, 산딸기 시트와의 조합 덕에 가X초콜릿 몇 조각 정도는 먹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즐길 수 있는 달달함이다. 밀크 초콜릿으로 감싼 겉을 한꺼풀 벗기면 여린 향과 조금은 심심한 맛이 있다. 하지만 겉면은 이것을 감추고 숨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짝거리는 달콤함을 더해주는 존재다. 달콤함을 느끼며 그런 생각을 했다. 특히나 많은 게 가려지는 요즘 그 안의 담백함을 더 반짝이게 해주는 그런 막이 존재한다면, 흩어지는 것들에도 담담해지는 날이 올까. 그러면 조여든 숨통이 조금은 트이는 듯 할 텐데.

겉이 다가 아니라지만, 때로는 눈에 보이는 다정함이 위안이 되기도 하니 말이다. 이 케이크도 동그란 겉면과 그 위의 은빛 가루, 마법사의 지팡이 같은 막대모양 초콜릿으로 내게 위안을 건넸다. 은빛 가루는 철저히 장식용인지 별 맛이 느껴지지 않았고, 위에 얹혀진 초콜릿은 달달함 사이로 헤이즐넛맛이 느껴졌다. 누텔라 맛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하지만 케이크의 자잘한 장식들은 주기적으로 바뀌기 때문에 아마 다음에 올 때는 다른 장식으로 바뀌어있을 수도 있다. 다음에 갈 땐 플레이팅이 어떻게 바뀌어있을까 기대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또 장식이나 케익의 디자인이 조금씩 바뀌어도 맛의 불협화음이 일어나지 않게 세심히 고려한 것이 보인다는 점이 매력이자 특징이기도 하다. 이번 장식의 경우 초코케이크 위에 또 초콜릿이 얹어졌지만 헤이즐넛향과 좀 더 깔끔한 식감 덕에 물리지 않게 조화되었고, 과일 시럽은 케이크에 부족한 상큼함을 더해준다. 초코와 크림이 물릴 때쯤 포크에 시럽을 콕 찍어 먹으면 만족스럽게 케이크를 즐길 수 있다. 

 

케이크를 탐내는 고양이(햇볕이 눈부셔서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분을 충전한 덕분에 연하고 부드러운 기분에 잠겼다. 사실 이건 몰리스의 뜻이기도 하다. 몰리스는 라틴어로 ‘연한, 부드러운’이라는 뜻이라는데, 케이크 맛과 딱 맞는 이름이다. 그런데 이 이름이 꼭 케이크에만 들어맞는 건 아닌 것 같다. 자전거, 비행기, 오토바이 등 온갖 탈거리들과 세계지도로 장식된 벽면, 직접 고르고 붙인 듯 투박한 벽지, 가게 곳곳에 붙어있는 사장님의 인터뷰 종이까지. 이곳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한사람의 과거, 현재, 꿈, 추억과 가족에 대한 마음 같은 것들이 시간의 지층을 이루며 켜켜이 쌓여있는 곳이었다. 이 지층들이 신촌 골목의 한 공간을 비로소 연하고,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게 아닐까. 그리고 오래도록 신촌의 한 자리에 머무를 수 있는 힘을 주는 게 아닐까. 포근하고 달콤한 맛과 함께 공간에 꿈과 소망, 그동안 일궈온 것들이 드러나는 이곳은 부드러운 동시에 단단했다.

그러니 이곳이 2층에 있는 것이 운명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이 위치에서는 모든 게 그대로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달리 보이게 한다. 언제나 위에 떠있는 존재였던 신호등과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높이, 그 아래에는 과거의 내가 있었다. 유플렉스 쪽 벤치에서 김밥을 씹으며 비둘기와 신경전을 벌이는 나의 모습이 선명하다. 솔직히 별로 멋있는 모양새는 아니지만 괜찮다. 시계바늘의 움직임이 한 칸 한 칸 쌓일수록 하늘빛이 바뀌고 계절이 흘러가듯, 과거의 지층은 계단을 만들듯 소중하게 한 칸씩 쌓이며 나의 시야를 바꿔나갈 테니까. 160센치 높이에서의 시야와는 다른 이곳의 풍경처럼 말이다. 그건 어쩌면 길을 가기 위해 툭툭 털고 일어나는 걸음 속의 연하고 부드러운 소망들을 바라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창밖의 노을져가는 햇빛은 눈이 부셨고, 텀블러 속 홍차는 오래도록 따뜻했다.

 


                    [몰리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창천동 62-21 2층

영업시간: 12:00 – 22:00 / 월요일 휴무

연락처: 02-6015-2442

 

 

 

 

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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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뭐 있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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