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4. 사람, 연희
#1. 안산도시자연공원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 시인은 <섬>이라는 시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말한다. 인간이 되어버린 이상 서로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결코 건널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널따란 바다에서 물장구도 치고, 가끔 소리도 지르다 보면 언젠가는 그 불가해의 영역 위에 둥실, 떠 있는 섬에 이르게 된다고 말이다.
조그만 동네의 작은 빌라에 살면서 고작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의 얼굴조차 모르는 필자 역시 이 같은 ‘섬’ 담론에서 자유롭지 못한 건 매한가지다. 그런 생각을 하며 무심코 걷다 도착한 곳은 도심 속의 작은 녹지 ‘안산도시자연공원’.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사이에 마치 섬처럼 자리 잡은 이곳에서 필자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완만한 산책로를 따라 오르다 보니 소음은 어느새 간데없고, 마른 나뭇가지 사이를 비집는 햇살만이 오롯했다. 손때 묻은 운동 기구가 즐비한 공터에 놓인 벤치에는 한 어르신이 앉아 계셨다. 가벼운 기능성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숨을 고르며, 동네 전경을 굽어보는 뒷모습에서 어쩐지 이곳의 일부가 되어버린 존재만이 풍길 수 있는 여유가 느껴졌다. 필자는 이끌리듯 발걸음을 옮겼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날이 참 좋네요. 운동 나오신 건가요?
네. 운동 삼아 공원 한 바퀴 돌고 잠시 숨 좀 고르는 중입니다.
연희동에 오래 사셨나 봐요. 동네 자랑 좀 해주세요.
말도 마세요. 나 서대문에서 태어난 사람이에요. 어릴 때는 홍제동 살다가, 북가좌동 거쳐서 연희동에 정착했어요. 서대문구 변천사를 내가 다 보고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웃음) 연희동 자랑이라…여기가 참 묘해요. 서울 한복판인데도 산줄기가 내려와서 공기가 달고, 동네가 참 점잖아요.
정말 서대문의 산증인이시네요. 요즘 인터넷과 SNS에서 연희동이 화젯거리인데요, 동네의 변화를 오래 지켜보신 입장에서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요즘 사람들이 ‘연희동’ 하면 카페나 맛집만 생각하는데, 진짜는 이 골목이에요. 저도 이 동네에서 평생을 보냈지만, 아직도 산책을 나와서 걸어 다니다 보면 “여기 이런 가게가 있었나?” 싶은 곳들이 많아요. 여기 처음 오는 젊은 사람들은 오죽하겠어요. 처음 왔을 적하고, 두 번째 왔을 적하고 느낌이 또 다르니까요. 우리 아들도 여기서 자라서 지금 저 밑에 연세대 졸업했는데, 안 그래도 요즘 친구들이 자꾸 연희동에서 약속을 잡는다고 하더라고요. 자기는 저기 종로나 성수처럼 다른 곳 좀 가고 싶은데. (웃음)
아드님이 연세대를 졸업하셨군요. 제가 후배네요.
아이고 그래요? 어쩐지 학생 인상이 참 바르다 했어. 학교 다니기 힘들진 않아요?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고?
동네에 워낙 맛있는 게 많아서 잘 먹고 다녀요. 선배님 아버님을 여기서 뵙다니 영광입니다.

연희동 골목이 워낙 좁고 경사가 급한데, 생활하시는 데에 불편함은 없으신가요?
저도 익숙해져서 그렇지, 처음에는 엄청 불편했어요. 지금이야 열선이 잘 깔려서 눈이 와도 금방 녹지만, 예전에는 상당히 곤란했죠. 차도 잘 못 다니지, 동네가 워낙 높이 있어서 걸어 다니기에도 쉽지가 않으니까. 겨울에는 정말 힘들었어요.

자비라고는 없는 연희의 눈길.
지하철이 다니지 않는다는 점도 불편함에 한몫했을 것 같은데요.
맞아요. 여기서 가장 가까운 역이 홍대에 있잖아요. 그런데 제일 가깝다고 해도 걸어가기는 좀 그래. 저는 그래도 차를 끌고 다니지만, 출퇴근 시간대에 버스를 보면 장난 아니에요.
갑작스럽게 질문을 드렸는데, 시간 내어주셔서 감사해요. 올해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있잖아요, 저는 이것도 다 인연이라고 생각해요. 오늘 집에 가서 아들한테 동문 만났다고 자랑 좀 해야겠어요. 학생, 나중에 공부하다 답답하면 여기 공원 자주 올라와요. 머리 식히기엔 여기만 한 명당이 없어요.
도시의 소음을 한 꺼풀 벗겨내고 적요한 자연의 품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은 어쩌면 빌딩 숲속에 사는 이들이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사치가 아닐까. 지난했던 겨울이 가고 마침내 날이 풀리는 3월이다. 얼었던 흙이 서서히 녹으면서 내뱉는 숨결이 사람들 사이의 온기만큼이나 향긋하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에디터님의 연희동 사랑이 뚝뚝 묻어나는 글이라 더 즐겁게 읽었네요. 속도에 치여 살기 바쁜 요즘 연희동 같은 곳이 더 절실해지는 것 같아요. 느림의 미학이 그리워질 때쯤 찾아가 봐야겠어요 ㅎㅎ
관통하는 주제, 쓰이는 단어들에 대한 깊은 사유가 느껴짐과 동시에 물흐르듯 진행되는 잔잔하고 가벼운 템포의 인터뷰들이 연희 그자체를 표현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요. 정말 오랜만에 제가 잔치에 있을 때 행복하고 치열하게(아무도 치열하라고 하진 않았으나) 글을 쓰던 모습이 생각나게 하는 글을 만난것 같아 이렇게 댓글을 남깁니다! 글 정말 정말 좋아요…. 취향저격… 오래오래 잔꾼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