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4. 사람, 연희
#2. 보틀라운지
공원에서 내려와 그야말로 ‘연희동’다운 골목을 지나면 곧장 나오는 카페가 있다. 일회성 만남이 지배하는 플라스틱 세상 속에서 묵직한 유리병이 제 가치에 걸맞게 반짝이고 있는 곳, 바로 ‘보틀라운지’다.

필자는 이곳의 대표 메뉴라는 쑥두유 라테를 주문했다. 역시나 일회용 빨대*는 함께 나오지 않는다. 숟가락으로 음료를 잘 저어 마시자, 향그럽고 쌉싸름한 녹색 쑥의 향미가 뭉근한 두유에 섞이는 것이 놀라울 만큼 조화롭다.
*요청하는 사람에 한해 다회용 빨대를 내어 주신다.

카페인 중독의 필자에게도 정말 매력적으로 느껴진 음료다.
일종의 컵 공유 시스템인 ‘리턴 미(Return Me)’ 제도를 통해 운영되고 있는 보틀라운지에서는 ‘보틀 클럽’에 가입한 회원에게 인당 최대 두 잔의 컵을 대여해준다. ‘제로 웨이스트’에 동참하는 근방의 카페들에서도 동일한 제도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컵에 음료를 받아 마신 뒤, 아무 곳에나 반납하면 된다. 연희동의 기저에 자리한 공존과 상생의 철학을 가장 현대적으로 해석한 공간으로 볼 수도 있겠다.

텀블러 반납은 연중무휴로 이루어진다.
참, 보틀라운지는 애견 동반 카페다. 필자는 주문한 라테를 다 비우고 일어나 나가려던 도중, 도무지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보더 콜리를 만났다.
선생님, 강아지가 정말 예뻐요. 실례가 안 된다면 잠시 말씀 나눌 수 있을까요?
어머, 감사해요. 얘가 여기 단골이라 그래요. (웃음)
보틀라운지의 단골이시군요. 연희동에 사시나요?
연희동은 아니고, 저기 길 건너 남가좌동에 살아요. 거기서부터 여기까지 강아지 데리고 산책 겸 슬슬 걸어오면 딱 좋거든요. 주말 오후에 이렇게 나와서 커피 한 잔 마시는 게 제 소소한 낙이에요.
보틀라운지는 일회용품을 쓰지 않는 ‘제로 웨이스트’를 지향하잖아요. 사실 손님으로서는 텀블러를 챙기거나 컵을 반납하는 일이 조금 번거로울 수도 있는데, 오히려 이런 가치가 연희동이라는 동네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요.
맞아요. 사실 보틀라운지 같은 곳이 이렇게 성업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의식이 성숙하다는 증거 같아요. 조금 느리고 품이 들어도 괜찮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잖아요. 사실 이런 종류의 카페가 처음 생겼을 때는 되게 생소했어요. 하지만 새로운 시도를 너그럽게 받아주고 그걸 꾸준히 소비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이런 문화적인 토양 자체가 연희동의 가장 큰 장점이지 않을까요.

보틀라운지에서는 다양한 제로 웨이스트 물품을 판매한다.
말씀을 듣고 보니 연희동 자체가 참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 없는 동네처럼 느껴져요. 솔직히 여긴 지하철역도 멀고 언덕도 많아서 오기에 좀 불편하잖아요.
그게 바로 연희동의 진짜 매력인걸요. 역에서 멀고, 다니기에 까다로우니까 시끄러운 인파가 덜 들어오잖아요. 옆 동네 홍대만 해도 주말에는 정신이 하나도 없잖아요. 보행이나 생활에 어느 정도의 제한이 있기 때문에 색깔이 뚜렷한 가게들이 생겨난다고 생각해요. 제가 연희동에 살지 않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속 좋은 소리일지는 모르겠지만, 지하철역이 없다는 불편함만큼 그로 인한 문화적 혜택이 크다고나 할까요.
불편함이 오히려 동네의 고유함을 지켜주는 역할을 하는 셈이네요.
동네 자체의 여유가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건 아니니까요.
주말 오후에 시간 내어주셔서 감사해요. 비슷한 생각을 공유할 수 있어서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아유, 저야 뭐 산책하러 나온 건데요. 다음에 마주치면 또 인사해요.
인터뷰를 마친 필자는 잰걸음을 놀리며 멀어지는 강아지와, 그 뒤를 따르는 이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며 느림의 미학을 공유하는 이들이 있기에, 연희동의 밀도가 유독 높고 따뜻한 것일지도 모른다. 효율과 속도가 지배하는 세상을 살아가며 조금은 더디더라도 서로의 가치관을 존중하며 걷는 사람들. 십 분 남짓의 대화가 맺어 준 짧은 인연이었지만, 타인을 향한 무구한 애정이 깃든 그녀에게서 필자는 연희가 지키고자 하는 ‘불편한 아름다움’의 실체를 가늠할 수 있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에디터님의 연희동 사랑이 뚝뚝 묻어나는 글이라 더 즐겁게 읽었네요. 속도에 치여 살기 바쁜 요즘 연희동 같은 곳이 더 절실해지는 것 같아요. 느림의 미학이 그리워질 때쯤 찾아가 봐야겠어요 ㅎㅎ
관통하는 주제, 쓰이는 단어들에 대한 깊은 사유가 느껴짐과 동시에 물흐르듯 진행되는 잔잔하고 가벼운 템포의 인터뷰들이 연희 그자체를 표현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요. 정말 오랜만에 제가 잔치에 있을 때 행복하고 치열하게(아무도 치열하라고 하진 않았으나) 글을 쓰던 모습이 생각나게 하는 글을 만난것 같아 이렇게 댓글을 남깁니다! 글 정말 정말 좋아요…. 취향저격… 오래오래 잔꾼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