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쇼콜라티끄
<너무 한낮의 불꽃놀이>
낮의 시간을 우리는 종종 당연히 여겨버리곤 한다. 해보다는 달이, 해그늘보다는 땅거미가 더 신비한 쪽이라 그래온 것일 수도. 하기야, 과장 좀 보태어 모든 판타지 사극의 시작은 보름달과 반딧불이 아닌가. 그 심볼들 사이에 끼워진 낮은 그저 이미 일어난 신비에 서사적 개연성을 보탤 뿐이다. 물론 판타지 사극과는 거리가 먼 #바쁘다바빠현대사회 에서도 상황은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 직사광선과 블루라이트가 가뿐히 침범해버린 우리들의 낮은 지루하고 평범하며, 또 지루하고, 또, 또….(하암) 그럴 땐 공상이 제격. 재미있고 쓸데없는 상상을 하나 해 보는 거다. 여기 어디엔가, 한낮에도 불꽃놀이를 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까아-만 밤 하늘에 숨어있다 팡-하고 제 색을 드러내는 그런 진-짜 폭죽들로 말이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낮은 조금 더 신비로울까, 선물 같을까. 식곤증과 함께 오는 이 애매하고도 따분한 한 낮, 아직도 유효하게 먹히는 판타지 영화의 클리셰처럼, 어디에선가 이 상상은 현실이 된다. 그렇다. 엉망진창인 내 삶과는 동떨어진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연희동의 한 낮, 어느 소박하고도 따스한 귀퉁이에 낮의 신비가 있다.
#Take 1.
햇살이 만드는 빛 번짐과 함께 들리는 옅은 폭죽 소리, 그리고 페이드아웃 된 행인 셋. 그 소리를 향해 줌인된 렌즈의 끝에는 세워진 자그마한 나무 간판이 비친다. ‘Chocolatique’. 이 작은 표지가 없었더라면 쉽게 찾지 못했을지도. 고개를 돌리면 네모 반듯한 작은 가게가 눈에 들어온다. 폭 들어가 있는 입구와 그 앞에 놓여진 화분 몇 개, 네모진 가게를 다시 반으로 나누는 문과 창.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감싸는 따뜻한 색감의 나무 틀. 이보다 낮의 향과 완벽하게 어울리는 곳이 있을까 싶다. 괜히 빨간 잔꽃무늬 원피스에 하얀 단화를 신고 베이지색 벙거지 모자를 쓴 다음 안을 들여다보고 싶은 그런. 그렇게 한 낮의 폭죽소리를 따라 도착한 쇼콜라티끄의 문은 생각보다 무거웠고(여느 비밀의 장소가 모두 그러하듯), 그 이후의 기억은 다음과 같다.

폭죽 소리를 따라 들어온 앨리스의 운명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진한 고동색의 천장. 이제 시작인가보다. 원래 불꽃놀이의 시작은 검은 하늘이니.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게 되는 고요한 씬. 그렇게 정확히 하나, 둘, 셋. 세 번의 발걸음을 떼면 홀린듯 찾아 헤맸던, 조용하고도 차분한 낮의 신비들이 나란히 놓여있는 장면이 펼쳐진다. 겉으로만 봐서는 절대 그 속에 숨겨진 화려한 색들을 가늠할 수 없는 폭죽처럼, 한 입을 베어 물기 전에는 그 맛을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짙은 고동색의 작고 동그란 신비들. 세상에 초콜릿이 수식하거나 초콜릿을 수식하는 단어들만큼 뻔하고 흔한 것이 없겠지만은, 감히 이 작은 가게의 초콜릿만큼은 그렇게 할 수 없을 것만 같다. 때론 카카오톡 친구 목록에서조차 사라진 친구로부터 온 메일 한 통 같은, 때론 아버지가 바알간 얼굴로 들고 오신 두 마리 만원의 통닭 같은, 그리고 때론 우리가 길을 걷다 맞닥뜨리는 하루의 고양이와 같은. 나에게 쇼콜라티끄의 동그란 초콜릿들은 잊고 있었던, 혹은 너무나 당연히 여겨버렸던 그 모든 일상의 행복을 일깨워주는 촉매재이자 복선이었기에. 큰 숨을 들이쉬고 나서야 새삼스레 느껴지는 낮의 바람 냄새와 공기의 촉감처럼, 그렇게 아주 가만히. 그러나 확실히.
숨겨놓았던 플롯의 메인 테마를 너무 일찍 스포해버린 것 같다. 그러나 어차피 알게 되었어야 하는 것이니 이제 본격적으로 이 낮의 폭죽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투명한 진열대 밑 옹기종기 자리한 초콜릿들은 꽤나 단순한 모양새를 띤다. 동그랗고 작다. 오히려 꾸며지지 않은 그 모양새가 더 신비롭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초콜릿의 종류는 셀 수 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쇼콜라티끄의 초콜릿들은 단단한 초코 셸 안에 저마다의 색과 맛을 품고 있는 프랄린으로 분류할 수 있겠다. 초콜릿계의 포춘쿠키라고나 할까. 프랄린이 주는 예상치 못함과 궁금증, 그리고 그에서 오는 소박한 기대가 합쳐져 그 투명한 진열대 앞을 한참동안 서성이게 되는 것일지도. 영화에나 나오는 운명같은 만남을 기대하며.

오늘 네가 만날 운명은 여기서 결정된단다.
이 곳의 프랄린들이 귀여운 이유는 저마다 자신의 예고편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다 같은 동그라미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자 하나씩의 모자를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바로 이 모자들이 그들이 품고 있는 맛에 대한 작은 예고편인 것이다. 초록 모자는 녹차, 분홍 모자는 라즈베리! 진열대에 함께 적혀 있는 이름을 보기 전에 각자의 줄거리를 점쳐 보는 소소한 놀이를 할 수 있는 것도 이 덕분이다. 재미있는 건 모름지기 같이 해봐야 제맛. 기대하시라, 퀴즈 나가신다. 위에 핑크색 소금 모자를 씌워놓은 초콜릿의 이름은? (힌트: 비싼 소금이다)

정답은 ‘단짠단짠의 최고봉’이다. 부제는 히말라야 핑크 솔트! 조금 재밌어지기 시작했다면 하나 더 해볼까나. 음, 연두색 네모 위에 노란색 점 하나가 콩 올라가 있는 초콜릿은 무슨 맛일까? (힌트: 어디서도 보지 못한 조합이다)

이것까지 맞췄다면 그대들도 만만치 않은 쩝쩝박사로 임명하겠다. 바로 유자&녹차의 환상조합 맛이다. 개인적으로 에디터는 쇼콜라티끄에 입덕하게 된 계기가 바로 이 유자&녹차라고 자부할 수 있다. 한입에 왕 하고 넣어 콕 하고 씹는 순간 진하고 상큼한 유자청이 팡하고 터지고, 유자와 초콜릿의 절묘한 조합을 정신 없이 느끼다보면 어느 새 담백쌉쌀한 녹차가 은은히 녹아 입 안을 정리해주는 그 완벽한 맛의 삼중주는 초콜릿 덕후인 나에게도 신세계였다. 물론, 이 맛은 아는 맛이 된 후에도 먹을 때마다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마치 초콜릿계의 뿌링클이라고나 할까. 돌이켜보면 처음 쇼콜라티끄의 문을 연 순간도 꽤나 운명적이었던 듯 하다. 마치 대본에 짜여진 듯 그 날, 그 시간 사장님은 뒷 편의 공방에서 그 초콜릿에 들어갈 유자청을 만들고 계셨고, 가게를 휘감은 그 향을 맡은 순간 나는 유자가 들어간 초콜릿을 고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일까, 쇼콜라티끄는 그 날의 향과 맛으로 기억되곤 한다. 가게를 나와 햇살이 가득한 연희동 거리에서 방금 들고 나온 초콜릿 한 개를 입에 넣었을 때의 그 모든 미장센과 함께.

유자 향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앞서 말한 맛들 이외에도 쇼콜라티끄는 참으로 다양한 조합과 맛을 연구하고 준비한다. 이 부분도 내가 이 자그마한 초콜릿 가게를 사랑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이다. 갈 때마다 거의 고정으로 나와 있는 단짠의 최고봉(히말라야 핑크 솔트), 마이 로라(로즈&라즈베리), 시칠리아의 유혹(피스타치오), 떼 오 쇼콜라(라즈베리), 다크 클래식(다크), 제주 녹차(녹차)를 포함해, 특별히 술 리큐어가 들어간 초콜릿들도 선보인다. 이는 하바나 럼과 스모키 위스키인데, 럼을 좋아하는 에디터는 하바나 럼을 적극 추천한다. 취향에 따라 럼 파는 럼을, 위스키 파는 위스키 맛을 맛보는 것도 좋겠다. 술이 들어간 초콜릿이 응당(?) 그래야 하듯이, 두 가지 맛 모두 술의 자기주장이 무척 강하다. (그렇다고 낮부터 취할 정도로 많이 먹지는 말기로 하자.) 그리고 방문할 때마다 진열대에 고정으로 늘 놓여있지는 않지만, 앞서 말했던 최애 메뉴인 유자&녹차, 라즈베리, 고흥 유자, 에스프레소 카페, 시나몬 밀크와 같은 맛들도 운이 좋으면 만나볼 수 있겠다. 혹시나 그날 꼭 맛보고 싶은 메뉴가 있다면 @chocolatique_seoul 을 통해 사장님께 문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이렇게만 해도 꽤나 많은 맛들을 선보이는 것인데, 쇼콜라티끄는 여기에서 조금 더 나아가 지능적으로(?) 덕후몰이를 하곤 한다. 덕후몰이의 기본이 무엇인가. 바로 ‘스 페 셜 에 디 션’ 아닌가. 계절에 따라, 혹은 각종 기념일을 맞아 가끔 신메뉴를 개발해 내어 놓으시고는 한다. 이미 덕후가 되어버린 에디터는 시즌 한정메뉴 출시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홀린 듯 시간을 내어 방앗간으로 발걸음을 옮긴 까닭에 대부분을 맛봤다. 가을 밤 철에는 몽블랑, 이번 밸런타인데이를 기념해서는 뱅쇼 맛 초콜릿을 선보이셨는데 개인적으로 뱅쇼 맛을 맛보고 다시 한 번 이 가게의 초콜릿에 흠뻑 빠져 버렸다. 아아 덕후의 삶이란.

덕후 탄생기
: 발렌타인 에디션에 ‘땡땡아 사랑해’ 적어서 보내주실 수 있나요
하는 요청사항을 흔쾌히 들어주시고 귀엽다고 인증까지 해주신 사장님
(그런데 이제 뽀짝한 손글씨를 곁들인)
좋은 재료로 정성스레 만든 초콜릿들이 그러하듯, 조그마한 덩치에 비해 가격은 만만치 않기에 작정하고 플렉스를 할 생각이 아니라면 누구나 그 앞에서는 힘겨운 결정의 순간을 거쳐야만 한다. 진열대 너머의 사장님과 눈이 마주치는 것도 민망할 정도로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겨우 골라 손에 든 두어 개의 초콜릿은 그러나, 우리에게 내일의 그리고 모레의 낮을 기대할 힘을 준다. 다음엔 이 맛을 꼭 먹어봐야지. 좋은 사람과 볕이 좋을 때 꼭 다시 와야지. 기분이 엉망진창이라 단 것에 돈을 왕창 쓰고 싶을 때 다른 곳 말고 여기에 와야지 하고. 그렇게 보면 우리는 내일과 모레를 살아갈 힘을 참 작은 것에서도 얻을 수 있구나. 고작 그 작은 두어 개를 사기 위해 일상과는 조금 벗어난 곳으로 옮기는 발걸음, 그 두 발 안에 들어찬 설렘과 기대, 그리고 혹시나 있을 작은 후회들까지도. 모두 온전히 나를 위해 내가 선물한 시간들이기에, 장면들이기에. 그렇게 나는 시간을 들여 찾아온 연희동의 한낮 안에서 달콤하게 감싸진 폭죽을 입에 넣는다. 펑-. 그 10초 남짓에서 나는 낮의 신비를 본다. 찰나의 마법을 뒤로 하고 우리는 다시 길고 고루한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그 이후의 일상은 이전의 날들과는 분명 다르다. 무대를 마친 무용수의 일상이 몇 분의 무대 이전과는 같을 수 없는 것처럼.
“날이 좋아. 앞으로 날이 좋은 날이 많을 거야.”
그럴 때가 있다. 우연히 듣게 된 누군가의 말에 주책맞게 눈물이 나는 그런 때. 날이 참 좋았던 날, 서대문 03을 타고 쇼콜라티끄를 갈 생각에 들떠 있던 나였다. 다행히 조금은 낮은 볼륨으로 맞춰 둔 음악 소리 너머로 들리던 뒷 자리 할아버지의 통화 소리. 보고픈 친구에게 걸려온 전화 같았다. 오늘은 날이 좋다고. 이제 봄이 오니까 앞으로 날이 좋은 날이 많이 있을 거라고. 그런데 아직 바람이 불면 추워. 그러니 건강 잘 챙기라며. 날이 좋은 초봄 어느 낮의 온도와 딱 맞는 따스함으로 마음을 전달하는 그 목소리에 나는 앞 자리에 앉아 눈을 굴리며 애써 눈물을 참았다. 하루를 살아내기 바쁜 낮의 시간들과 그 후 밀려오는 갖은 불안과 공허로 가득 찬 나의 밤들에게 해주는 말 같아서. 앞으로 날이 좋은 날이 많을 거라고.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그냥 이렇게 좋은 날, 예쁜 낮을 선물받은 것에 감사하며 살자고. 그렇게 나는 쇼콜라티끄에 도착했다. 날이 좋은 날, 좋은 사람을 데리고 이 곳에 올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그리고 고생했을 나를 위해 두 어개의 초콜릿을 선물할 수 있다는 것에 행복해하며. 카메라는 다시 작은 초콜릿 가게의 문을 여는 손을 클로즈업하고, 그 위로 사선의 햇살이 내려앉는다. 그렇게 결말은 열린 채 스크린은 검어지고, 검은 바탕에 하얀 글씨가 떠오른다.


쇼콜라티끄(Chocolatique)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130-13
매일 11:00 – 20:00, 월요일 휴무
(휴무 변동은 @chocolatique_seoul 참고)
070-8870-6598
https://m.smartstore.naver.com/chocolatique
*’너무 한낮의’ 라는 표현은 김금희 작가의 <너무 한낮의 연애> 라는 소설에서 차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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