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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2026 · 03 · 11

494. 사람, 연희

Editor 폴

#3. 연희문학창작촌

쌉싸름한 라테 한 잔의 여유를 즐기고 다시 공원을 걸어 내려와 5분 정도 걷다 보면 한갓지고 야트막한 골목이 눈에 들어온다. 칠이 벗겨진 붉은 담벼락이 고즈넉한 느낌을 주는 ‘연희문학창작촌’이다. 과거 시사 편찬 위원회로 쓰이던 건물이 리모델링을 거쳐 작가와 시민의 쉼터가 된 것인데, 그렇지 않아도 무악의 자락에 둘러싸여 세상과 한 걸음 멀어진 동네에 다시 한 겹 담벼락을 둘러놓으니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요 최고의 작업실이다.

 

 

‘요새’라고 표현은 했지만, 창작촌 내부의 공기는 무겁고 어둡다기보다 싱그럽고 과묵하다. 문인들의 작업 공간을 찾는 자유로운 발걸음을 환영하되 섬세한 배려를 당부하는 식의 운영 방침도 전혀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산책로를 거닐다 보면 바로 옆에 자리한 건물 안에서 지금도 열띤 창작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새롭게 다가오기도 한다. 4개의 동으로 구성된 작업실의 이름은 각각 끌림, 홀림, 울림, 들림. 발음만으로도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울림소리를 활용해 이름이 붙여진 작업실을 보고 있자면 “예술가는 고독해야 하지만, 작품과 함께 있는 한 결코 혼자가 아니다”라던 릴케의 말이 떠오른다.

 

 

그러나 고독과 침잠의 공간 속에서도 줄기차게 피어나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보다. 자꾸만 필자에게 천연한 눈빛을 보내며 부얼부얼한 솜털을 다리에 연신 부벼대는 이곳의 고양이만 보아도 그렇듯이.

 

 

해사한 볕이 드리운 오후의 창작촌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중, 정처 없이 거니는 한 청년을 만났다. 무언가 커다란 고민을 어깨에 얹고 있는 듯, 가끔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는 눈과 바싹 마른 낙엽을 괜스레 툭툭 건드리는 발끝. 그의 모습이 너무나 깊은 상념에 잠겨 있는 것만 같아, 혹여나 필자의 한마디가 소중한 사색을 흐트러뜨리지는 않을까 싶어 선뜻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

 

안녕하세요. 혹시 글을 쓰시는 분인가요?

글을 쓰기는 하죠. 작가 지망생이라고 하기엔 조금 민망한 작업량이기는 하지만요. 지금은 평범한 직장인이에요.

 

직장 생활과 창작을 병행하는 게 쉽지 않으실 것 같아요. 연희동에는 어쩐 일이신가요?

아, 저는 이 근방에 살고 있어요.

 

동네 주민이셨군요. 반갑습니다. 연희문학창작촌에는 자주 오시는 편인가요?

아무래도 글 쓰는 일을 좋아하고, 언젠가는 업으로 삼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못해도 한 달에 두어 번씩은 찾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작가를 꿈꾸시는 건가요?

소설을 좋아해요. 취미 삼아 쓰기도 하고요.

 

저는 연희동에 관한 글을 쓰러 취재를 나왔는데요, 연희동만이 가지는 매력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누군가에게 연희동을 소개할 때 제가 항상 하는 말이 있는데, 바로 ‘밀도’가 다르다는 거예요. 보통의 동네가 수평이라면, 연희동은 세월이 수직으로 쌓인 느낌이거든요.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답답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특색인데, 일단 저는 그 점이 마음에 들어서 계속 살고 있어요.

 

 

세월의 밀도가 다르다…듣고 보니 정말 맞아요. 저도 종종 연희동에서는 시간의 흐름도, 그 체적도 외부와 약간은 다른 것 같다는 느낌을 받거든요.

저는 실제로 다르다고 느껴요. 분명 주류와는 거리가 있는 동네이기에, 트렌드의 흐름에 발맞추는 동네는 아니죠.

 

오늘처럼 날씨 좋은 봄날에 연희문학창작촌에서 읽으면 좋을 만한 소설이 있을까요? 추천 부탁드려요.

이곳에서 읽을 만한 책이라…제가 최근에 읽은 소설이 생각이 나는데요, 백수린 작가의 <여름의 빌라>라는 책이에요. 일단 문체가 참 정갈하고요, 장면 사이에서 느껴지는 일상에 대한 섬세한 관찰이 인상적이라고 할까요. 연희동도 그렇잖아요. 작고, 얼핏 보면 별거 아닌 것들이 나름의 가치를 부여받는 동네니까요.

 

추천 감사합니다. 꼭 읽어볼게요. 예비 작가님의 손도장이 이곳에 찍히게 될 날을 응원하겠습니다.

 

 

길지 않은 방문을 마치고 연희문학창작촌을 나서는 길, 자연스러운 순서처럼 입구의 담벼락에 빼곡하게 붙은 문인들의 손도장을 지그시 바라보게 된다. 도심 속 무풍지대 같은 이곳에 번민 따위는 없다. 오로지 절창을 위해 분투하는 작가들의 치열한 사색만이 있을 뿐이다.

 

작업실 사이사이로 나 있는 산책로를 거닐다 보면,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산란했던 마음이 절로 잦아든다. 고독할 정도로 스스로에게만 침잠하는 일은 어쩌면 자기 안에 존재하는 누군가를 더 깊이 이해하는 일과도 닮아있지 않을까. 그 누구보다 가까이에 살고 있지만 그 누구보다 알지 못하는 ‘누군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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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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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

COMMENTS

댓글 2

  1. nimo
    nimo 2026.03.11 22:44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에디터님의 연희동 사랑이 뚝뚝 묻어나는 글이라 더 즐겁게 읽었네요. 속도에 치여 살기 바쁜 요즘 연희동 같은 곳이 더 절실해지는 것 같아요. 느림의 미학이 그리워질 때쯤 찾아가 봐야겠어요 ㅎㅎ

  2. 챌라또
    챌라또 2026.03.12 07:40

    관통하는 주제, 쓰이는 단어들에 대한 깊은 사유가 느껴짐과 동시에 물흐르듯 진행되는 잔잔하고 가벼운 템포의 인터뷰들이 연희 그자체를 표현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요. 정말 오랜만에 제가 잔치에 있을 때 행복하고 치열하게(아무도 치열하라고 하진 않았으나) 글을 쓰던 모습이 생각나게 하는 글을 만난것 같아 이렇게 댓글을 남깁니다! 글 정말 정말 좋아요…. 취향저격… 오래오래 잔꾼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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