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4. 사람, 연희
#5. 연희동 국화빵
그윽한 연기의 향내를 온몸에 묻히고서 10분 정도 걸었을까, 눈앞에 연희의 마스코트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는 ‘사러가 마트’가 보인다. 그리고 그건 지금 내가 ‘연희맛로’의 중앙에 서 있다는 뜻이다. ‘연희맛로’는 연희동의 터줏대감 ‘피터팬 제과점’의 맞은편 도로부터 성산로까지 이어지는 골목 상권에 붙여진 이름이다. 길 하나만 건너면 곧장 ‘연희로’지만, 이곳에 이렇듯 독보적인(?) 이름이 붙은 이유는 바로 이 거리가 연희동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러가 마트를 지나 몇 걸음만 걸으면 좁은 골목을 가득 채운 인파가 보인다. 짐작만으로도 알 수 있다. 저 사람들이 모두 ‘국화빵’을 먹기 위해 이곳에 모여든 것이라는 사실을.

아니나 다를까. 저마다의 손에 하얀 종이봉투가 들려 있다. 가게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달큼하고 폭신한 국화빵의 냄새가 자꾸만 발걸음을 재촉한다. 국화빵을 굽고 계신 사장님 옆으로 ‘오늘의 메뉴’를 적은 메뉴판이 보인다. 이곳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재미있는 점은 갈 때마다 국화빵의 맛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오늘의 메뉴는 팥과 호지차, 그리고 슈크림이다. 길게 늘어선 줄 맨 뒤에 합류해 앞의 손님에게 말을 건네 본다.
안녕하세요, 줄이 정말 기네요. 연희동에 사시나 봐요.
아니에요, 저는 용산에서 왔어요. 국화빵 하나 먹어보겠다고 이 줄을 섰네요.
정말요? 용산이면 정말 먼 걸음 하셨네요. 특별한 계획이라도 있으셨던 거예요?
오랜만에 만나는 고등학교 동창 모임이 연희동에서 있었거든요. 다들 직장 다니고 애 키우느라 바빠서 일 년에 한두 번 보기도 힘든데, 큰맘 먹고 모였죠. 방금 다 같이 점심 먹고, 차도 한잔하고 헤어졌어요. 저는 집 돌아가기 전에 잠깐 시간이 떠서 와봤네요. 하도 유명하다길래요. (웃음)
점심은 어디서 드셨나요?
근처 중국 요릿집에 방을 잡고 먹었어요. 예전부터 연희동 중국집이 맛있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 왔는데, 오늘 처음 와 봤요.
그렇군요. 연희동에 유명한 중국집이 많다는 사실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저도 늘 가보고 싶었어요. 평소에도 연희동에 자주 오시는 편이신가요?
음… 아무래도 자주 오지는 못하죠. 평일에는 저도 여의도 왔다 갔다 하면서 직장에 다니느라 일에 이리저리 치이고, 주말에는 녹초가 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날 좋은 주말에 나들이 삼아 일 년에 한두 번 오는 정도인 것 같아요.
귀한 발걸음을 하셨네요. 선생님께서 생각하시기에 ‘연희’만이 가진 고유한 색깔이 있다면요.
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애매하네요. 다른 동네에서는 받은 적 없는 느낌인데, 연희는 꼭 다시 찾아오고 싶은 마음이 드는 곳이에요. 내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보물 같은 장소가 골목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요. 다른 곳처럼 화려하거나 애써 꾸미지 않아서 매력적이기도 하고요. 지금만 봐도 국화빵 하나 먹겠다고 이 줄을 서고 있잖아요. 그런데 하나도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기다리는 시간이 즐겁거든요.
놀라운 회전율이다. 긴 줄의 가장 꼬리에 서서 한참 기다릴 양으로 마음을 비우고 있었는데, 대화 몇 마디를 나누자마자 내 몫의 국화빵이 나왔다.

방금 막 구워낸 국화빵은 바삭하기보다 촉촉하다. 식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한입 베어 물자, 쫀득하고 달콤한 반죽의 질감이 혀끝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진다. 말도 잘 나오지 않을 정도로 뜨겁지만, 돌아가는 길에 하나씩 집어먹다 보면 금방 동이 난다. 아쉬운 마음으로 마지막 국화빵을 입에 넣는다. 그새 미지근하게 식어 버렸지만, 여전히 포근하고 달다. 기다림 끝에 본래의 온기가 식어도 나름의 고유한 맛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 그것이 연희의 매력이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에디터님의 연희동 사랑이 뚝뚝 묻어나는 글이라 더 즐겁게 읽었네요. 속도에 치여 살기 바쁜 요즘 연희동 같은 곳이 더 절실해지는 것 같아요. 느림의 미학이 그리워질 때쯤 찾아가 봐야겠어요 ㅎㅎ
관통하는 주제, 쓰이는 단어들에 대한 깊은 사유가 느껴짐과 동시에 물흐르듯 진행되는 잔잔하고 가벼운 템포의 인터뷰들이 연희 그자체를 표현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요. 정말 오랜만에 제가 잔치에 있을 때 행복하고 치열하게(아무도 치열하라고 하진 않았으나) 글을 쓰던 모습이 생각나게 하는 글을 만난것 같아 이렇게 댓글을 남깁니다! 글 정말 정말 좋아요…. 취향저격… 오래오래 잔꾼해주세요!!